한대수
아카이브

2019년 뉴욕에서의 이틀간 인터뷰, 그리고 2022년 직접 써서 보내온 ‘행복의 나라’ 회고록

기록 · 사진 이기찬  |  회고록 글 한대수
인터뷰 2019년 8월 6~7일, 맨해튼 32번가 · 퀸즈 자택

한대수 친필 서명

Archive

왜 이 기록인가

한대수를 다룬 자료는 많지만, 본인이 직접 말하고 직접 쓴 1차 기록은 드물다. 이 페이지는 두 개의 1차 자료로 이루어져 있다. 2019년 8월 뉴욕에서 이틀에 걸쳐 진행한 인터뷰 전문, 그리고 2022년 1월 한대수가 ‘행복의 나라’ 표절설을 반박하려고 직접 써서 보내온 회고록이다.

한대수가 보낸 회고록 친필 원고의 첫 장
한대수가 보낸 회고록 친필 원고의 첫 장

Chronology

연보

이 페이지의 두 자료에 나오는 사실만 옮겼다. 자료에 없는 연도는 비워 두었다.

젊은 시절의 한대수. 한대수 제공(연도·장소 미확인)
젊은 시절의 한대수. 한대수 제공(연도·장소 미확인)
무대 위의 한대수. 한대수 제공(연도·장소 미확인)
무대 위의 한대수. 한대수 제공(연도·장소 미확인)
기타를 든 한대수. 한대수 제공(연도·장소 미확인)
기타를 든 한대수. 한대수 제공(연도·장소 미확인)

위 세 장은 한대수가 회고록과 함께 보낸 사진이다. 원본이 작은 스캔본이라 크게 싣지 않았다.

1969년 9월, 남산 드라마센터 솔로 리사이틀
1969년 9월, 남산 드라마센터 솔로 리사이틀
1970년 한국디자인포장센터 창립
1970년 한국디자인포장센터 창립
1972년 양희은 1집. ‘행복의 나라’가 음반에 처음 수록됐다
1972년 양희은 1집. ‘행복의 나라’가 음반에 처음 수록됐다

Interview · 2019.08.06–07

뉴욕에서 이틀, 한대수를 만나다

첫날은 맨해튼 32번가 브로드웨이의 공원에서 한 시간, 다음 날은 퀸즈 자택에서. 자택에서는 한 시간 인터뷰 뒤 세 시간 동안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셨다.

한국 대중음악사는 한대수다. 대중음악인 가운데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단언컨대 존재하지 않는다. '혼돈'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영사기를 통해 투영한다면 바로 그의 삶. 그를 규정하기 위한 노력들로 잉태해낸 수식어들조차 역설적으로 그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

정보의 바다 속 자신을 다룬 자료들 대부분이 범람하는 페이크 뉴스라며 통탄하던 그가 지난 6월 에세이집 〈나는 매일 뉴욕 간다〉를 출간했다. 딸을 위해 되돌아온 고향 뉴욕을 '살아가는 곳'이라기보다 아직 '가고 있는 장소'로 관조하며 40년 뉴요커로서 진솔한 자화상을 담았다. 반세기 이상 찬찬히 쌓아올린 그의 모노리스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노력으로 뉴욕에서 이틀간 인터뷰를 부탁했다. 진솔한 일대일 대화에 가깝던 인터뷰, 장소는 첫날 맨해튼 32번가 브로드웨이, 다음 날 퀸즈에 위치한 한대수 자택이다.

맨해튼 32번가, 브로드웨이에서 한대수를 만나다

뉴욕에 가신지 3년 정도 됐다. 〈나는 매일 뉴욕 간다〉 책을 냈는데 뉴욕 생활의 가장 큰 장점은?

전 세계 대도시에 거의 다 거주해봤다. 뉴욕만의 장점은 지금 여기 공원에 앉아서 우리가 보고 있는 뷰가 말해주듯 세계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저기 누워 있는 홈리스들, 벌써 하나, 둘, 셋이 넘지. 반대로 저기 지나가는 억만장자 양복쟁이들. 인종, 나이, 성별, 계층, 계급 구분 없이 다 볼 수 있다. 좋은 건 배우고 나쁜 것에서부터도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것. 그리고 뉴욕은 전 세계의 수도다. 슬프게도 암살당했지만 뉴욕을 제2의 고향으로 삼은 레논, 말년을 소호에서 보낸 데이비드 보위 같은 록스타들도 많이 살았고.

단점이 있다면?

단점은 너무 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보장해주다 보니 생기는 총기사건 등. 무섭지 않나.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총이 문제다. 미국은 총으로 세워진 국가다 보니 총을 없앨 수 없는 숙명이지. 또 하나, 너무 노후된 인프라 문제다. 지금은 내가 50년 전에 뉴욕에서 살 때보다 삶의 질이 떨어졌다. 인구 밀도가 급격히 늘어나기도 했고. 그래도 그때나 지금이나 주위 건물들은 비슷하니 그 추억에 뉴욕에 살아가고. 고향이라 부르는 것이 맞겠다. 인종들 간의 갈등도 트럼프 이후 더 심해진다. 원래 미국을 인종의 용광로라 멜팅 팟(Melting pot)이라고 불렀는데 현재 뉴욕은 이미 끓어 넘쳐 멜티드 오버(Melted over) 된 것 같다.

뉴요커로서 뉴욕의 음악적 스팟을 추천한다면? 예를 들어 앨범커버 배경이라든가.

밥 딜런 앨범 〈The Freewheelin' Bob Dylan〉 앨범커버가 웨스트 4번가에서 찍은 것은 알고 있을 것이고. 그래서 애인과 4번가에서 동거하던 시절 쓴 곡 'Positively 4th Street'도 있지 않나. 조니 미첼, 제임스 테일러도 아마 아직 여기 살 것이고, 얼마 전에 작고한 레너드 코헨의 'Chelsea Hotel'이 바로 맨해튼에 있지.

혹자는 한대수를 한국의 밥 딜런이라고도 하는데.

나는 뉴요커지만 밥 딜런은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닐 영이라 불러주었으면 한다. 30여 년 전 라이브를 봤는데 그의 공연이 너무 자기 주장이 강한 느낌이어서 청중에 대한 배려가 덜하다고 느꼈고, 이번 노벨상 시상식 불출석 에피소드도 지나친 오만함을 느꼈다. 이런 사람을 자신이 신이 된 마냥 행동하는 갓(God) 콤플렉스를 가졌다고도 한다. 닐 영과 나는 노래하는 스타일이나 삶에 대한 삐딱한 시선이 비슷하다고 본다. 〈After The Gold Rush〉 앨범은 꼭 듣길.

'나만의 장소'가 있다면?

나는 상처가 많다. 앨범 〈상처〉도 있지 않나. 이혼 후 내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진 53번가 근처 파운탱(Fountain) 공원이었다. 음악가들이 많이 거주하는 이스트 빌리지 근처 톰프킨스(Tompkins) 스퀘어 공원도 자주 가는데, 지저분하지만 인간 고통의 냄새가 난다. 반스 앤 노블 같은 책가게에서는 편하게 휴식하며 고통을 치유하는 편이다.

인생은 여행이라고 말했는데 그 종착지가 바로 뉴욕인지.

아니다. 뉴욕은 딸을 세계인으로 키우려는 장소이고 나는 여기서 죽을 생각이 없다. 나는 서울이 좋다. 새벽에 값싸게 해장국 먹으러 나가는 낙이 있지 않은가. 한국 사람들의 그 가끔은 지나칠 정도의 정이 항상 그립다. 대중교통도 전 세계 최고고. 가장 중요한 것은, 뉴욕에 비해 서울 생활비가 1/3 정도라는 것이다. 딸이 대학교 입학 후 독립하면 다시 한국에 가고 싶다. 그때까지 살아있어야지.

뉴욕에서 공연 계획은?

뉴욕, 뉴저지, 코네티컷 세 개의 주에 한인이 60만 명 가량 산다. 워낙 생활력이 뛰어나 거의들 자리 잡았고. 그래서 공연을 하면 6000명은 올 거라 생각했다. 3년 전 뉴욕 도착하자마자 맨해튼에서 규모에 비해 가장 사운드가 좋은 라디오 시티 뮤직홀 디렉터와 대화까지 마쳤다. 문제는 6000명이 모이지가 않는 것, 아니 모일 수가 없는 것. 교포들이 가진 것에 비해 문화생활을 즐기는 분위기가 아닌 환경임을 느꼈다. 보통 7-80년대에 여기 오신 분들이 대부분이라 한국에서 공연문화를 접하기 어려웠고, 이민 와서는 워낙 열심히 살 수밖에 없었다. 비콘 극장(Beacon Theater) 2500석은 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워낙 절차가 복잡해서 멈춰 있는 상황이다.

예전에 "Art is like a fart"라며 예술은 방귀처럼 갑자기 터져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아까 받은 명함을 보니 직함을 사진가와 저널리스트로 기재했고 뮤지션은 적혀 있지 않더라. '음악'이라는 예술욕은 현재 참고 있는 것인지.

변명처럼 들릴 수 있지만, 내로라하는 대가들도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새로이 대단한 것을 만드는 일은 별로 없다. 대부분의 작곡은 영감에서 오는데 그 한계가 존재하는 것 같다. 창작을 할 수 있는 기간이 있다고 할까. 새로운 자극을 통해 영감을 받는데 이제 웬만큼 살았다 보니 신선한 자극을 느끼기 힘들다.

한대수하면 보통 포크에 기반을 둔 싱어송라이터로 바라본다. 오히려 훨씬 다양한 장르에 손댄 것 같은데. 흡사 끊임없이 욕망하고 갈망하는 개츠비가 떠오를 정도로.

장르라 하니 1989년 3집 〈무한대〉를 만들 때가 기억난다. 뉴욕에서 겪게 된 이혼의 고통은 상상보다 훨씬 흉악했고 이를 승화한 앨범이다. 〈무한대〉를 녹음할 때, 대중음악인들에게 '재즈'를 말하면 보통 떠올리는 장르는 '블루스'였다. 그래서 블루스를 자제한 재즈를 시도했고. 그것이 어떻게 보면 록이기도 하고.

1990년 4집 〈기억상실〉은 당대 뉴욕에서 유행하던 최첨단의 시각을 접목한 앨범이다. 팻 매스니, 칙 코리아, 찰스 로이드 같은 뮤지션들을 많이 들었다. 지금 우리나라 밖에는 이런 음악도 있고 우리도 이것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소개하고픈 사명감이 넘쳤다. 당시 다행히 잭 리(Jack Lee)라는 재즈 기타리스트가 있어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프리재즈에 가까웠나.

그 다음 1992년 5집 〈천사들의 담화〉는 들어봤으면 알겠지만 미니멀리즘 그 자체다. 왜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3, 4집이 영어 가사도 많고 아방가르드적이어서 대중에 외면을 받았다. 5집 찍겠다는 레코드사가 없었고 괴로운 마음에 그냥 뉴욕에서 출퇴근하며 돈을 벌었다. 그러다 불현듯 욕구가 샘솟고. 어떻게든 풀어야겠기에 피아노 1대와 집에서 녹음했지.

보위의 베를린 3부작과 비슷하게 〈무한대〉부터의 3부작의 영감 또한 뉴욕이라는 지역이었는지.

맞다. 저 시기는 힘든 시기였다. 이후 2000년대 앨범들은 비교적 편하게 작업했지. 2000년 〈Eternal Sorrow〉 만들 때가 기억난다. 아마 번역하자면 영원한 슬픔 정도로 해두자. 기타리스트 손무현이 프로듀싱을 아주 깔끔하게 했다. 이때는 우리나라 최고 세션들이 모였다. 함춘호, 이우창, 신연아 등. 2004년 작 〈상처〉도 경희대 녹음실에서 깔끔하게 했고. 그때도 가장 유명한 세션들을 불렀고 지금은 뭐 이제 대가들이지 않나.

퀸즈의 저택에서, '사는 것도 제기랄 죽는 것도 제기랄!'

2015년 40주년 기념 리메이크 앨범 〈Rebirth〉 참여진을 잠깐 나열해보자. 조영남, 전인권, 이선희, 신대철 등. 더 말하면 입이 아플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역사다.

그 앨범이 프로듀싱도 잘 되었고 정말 좋은데 특히 10번 트랙 'Run baby run'을 들어보기 바란다. 김목경, 신대철, 김도균, 손무현 이렇게 블루스 기타 잘 치는 사람들이 다 모였다. 이를 4g라 하지. 흥겹게 녹음한 기억이 있고 완성품도 정말 만족스러웠다.

그 앨범들이 다 지금 LP로 재발매가 되었다. 이를 LP로 들어보았는지?

집에 턴테이블이 없어서 LP로 들어보진 못했다. 몇십 년 전에 턴테이블과 LP 콜렉션을 다 헐값에 넘겼지. 요새는 음악을 들을 때 거의 CD로 듣는다. 최근에는 딸 양호가 유튜브를 연결해주었는데 디지털 음원에는 역시 익숙해지지 않는다. 다이나믹 레인지가 너무 얇다. 다시 말해 음폭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요즘에 자주 듣는 음악은? 감동받은 음악이 있다면.

음악이 너무 많다. 예전에는 음악다방에 가야만 DJ가 들려주는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어릴 때 명륜동에 살았는데 퀸 다방에서 비틀스 애비로드 앨범을 들은 추억이 생각나고. 그게 나의 자양분이다. 요즘 문제는 음식점, 옷가게, 책가게에도 다 음악이 나오는 것. 강요되는 음악들의 과잉이다. 음악 청취의 소중함이 퇴색되니 위대한 음악가보다는 엔터테이너가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시대의 조류일 수 있지만. 가끔은 음악이 없었으면 좋겠다. 목소리가 듣기 좋은 사람과의 대화, 그 얼마나 좋은가. 지금 공원의 바람소리는 또 어떻고.

어쩌면 음악 과잉의 시대에는 침묵도 음악이 될 수 있겠다. 존 레논 〈Mind Games〉의 3초 간 침묵하는 곡 'Nutopian International Anthem'처럼.

정확한 지적이다. '침묵'도 음악이다. 나에게도 〈침묵〉이라는 시집과 5집 〈천사들의 담화〉에 실린 '침묵'이라는 제목의 곡이 있다. 말 그대로 침묵을 담았다. 침묵과 연관된 곡으로 5집과 묶이는 4집 〈기억상실〉에서 가장 아끼는 'Headless man'이라는 곡도 있다.

'Headless man'은 어떤 곡인지. 지금 보니 영어 가사가 파격적이다.

아포칼립스에 따르면 지구가 멸망할 때 'Headless horseman'이 지구를 누비며 구도한다고 한다. 내가 대중음악계 'Headless man'이 되고 싶은 열망도 담겨있을 것이다. 또 중의적으로 제목을 직역하면 머리 없는 남자, 다시 말해 머리가 빈 사람이라고도 생각했다. 가사 중 'Headless man walking down the 5th ave & 53rd st'이 있다. 이 장소는 뉴욕현대미술관 MOMA와 세인트 패트릭 대성당이 있는 곳으로 누가 뭐래도 지구의 중심이다. 당시 다니던 직장인 사진스튜디오가 그 근처기도 했고.

예전 인터뷰에서 특별히 아끼는 앨범이나 곡은 없다고 했는데 한대수를 처음 접하는 이에게 앨범 감상순서를 추천하자면.

순수하고 오케스트레이션이 많은 2집 〈고무신〉으로 시작해 〈무한대〉, 〈Eternal Sorrow〉 후 7집 〈이성의 시대, 반역의 시대〉 정도 듣고 2000년대의 〈고민〉, 〈상처〉 순으로 가는 방법이 좋을 것 같다. 의외로 1974년작 1집 〈멀고 먼 길〉이 가장 어려운 앨범이다.

예상과 다르다. 대중들은 오히려 '행복의 나라', '물 좀 주소'로 1집이 가장 익숙할 텐데.

맞다. 45년이나 된 앨범이고. 그러나 1집은 편하게 들을 앨범은 결코 아니다. 오케스트레이션도 별로 없고. 들을수록 색다른, 어려운 음악이다. 푹 빠져들어보길 추천한다. 〈천사들의 담화〉와 〈욕망〉은 내가 생각해도 괴짜다. 특히 〈욕망〉은 장영규가 프로듀싱 했고 달파란, 방준석 등과 같이 작업한 재밌는 앨범이다. 〈지렁이〉도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하고. 정통 록을 들으려면 프로듀서 존 롤로(John Rollo)와 뉴욕에서 작업한 1999년작 〈이성의 시대, 반역의 시대〉도 추천한다. 당시 말랑말랑한 록이 유행이었는데 너무 카랑카랑하게 때려버려서 망했지만. 즐겁게 듣기에는 40주년 앨범 〈Rebirth〉가 좋다. 참여한 모든 아티스트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특히 이상은과 이현도 리메이크는 듣고 놀랐다.

작년 한국에서 〈할리우드와 피터의 늑대〉라는 극의 내레이션을 맡았는데.

재미있게 했다. 미국 버전에 내레이션은 앨리스 쿠퍼가 맡았다. 앨리스 쿠퍼도 쇼크록을 하고 집안이 목회 쪽이고. 앨리스 쿠퍼는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뮤지션이지만 좋아한다. 나는 유행하는 아티스트들은 거의 다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덜 알려진 뮤지션 중에 추천해주고 싶은 이들이 많다.

가끔은 주류에서 벗어난 이들이 당길 때가 있다.

'I put a spell on you'의 주인공 스크리밍 제이 호킨스(Screaming Jay Hawkins)를 들어보라. 할리우드 살 때 150명 들어갈 작은 클럽에서 보고 완전히 팬이 되었다. 1929년생 스크리밍 제이 호킨스가 2000년에 죽고 나서 자기가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2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 유명한 믹 재거도 자식이 10명 이하지 않나. 한 수 위인 대단한 아티스트다. 전자음악 계통에서 장 미셸 자르(Jean-Michel Jarre)를 좋아하고 브라이언 이노 솔로 앨범들도 추천한다.

조선일보에서 4년 정도 연재한 칼럼 '사는 게 제기랄' 제목이 인상깊었다.

이혼 후 사는 게 너무 힘들었지만 죽는 것도 무서웠다. 사는 것도 제기랄, 죽는 것도 제기랄이지. 너도 살고 나도 살자 뭐 그런 의미다. 원래 제목은 한대수의 바람과 나였다. 김민기, 김광석이 부른 '바람과 나' 작곡한 게 나다. 사실 원하던 제목은 'Life is bitch and then you die'였는데 편집장이 조금 순화했지. 결국 둘 다 조금씩 양보한 셈이다. 조선일보도 나를 칼럼니스트로 쓴 것도 용감했던 것 같다. 칼럼도 다시 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콘서트든 책이든 오퍼만 들어오면 다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젊은 시절 뉴욕에서 활동한 징키스칸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뉴요커들이었지. 다들 투잡 뛰었고. 이삿짐을 나르거나 포르노 배우를 하는 멤버도 있었다. 잘 안되어 뿔뿔이 흩어지고 마스터테이프도 소실되었다. 그때 내가 20대 초반. 더 열심히 했어야 하는데 1년 조금 넘게 하고 빨리 포기했지. 주위에서 블론디, 토킹헤드처럼 같이 공연하던 밴드들은 막 잘나가고. 뉴욕을 주도하는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젊은 음악가들을 밀어주는 경향이 있었다. 사람들이 유대인=돈으로 생각하는데 유대인=돈=예술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지원이 없던 것이 실패의 이유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 당시 록스타가 되고 싶었다. 충분한 백그라운드가 있었다면 성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실감이 가끔 들었다. 예를 들어 브루스 리가 〈Enter The Dragon〉으로 서양에서 최초로 성공한 동양인이 되었는데, 내가 그때 음악에만 전념해 첫 번째 동양인 록스타가 되었더라면.

향후 계획이 있다면.

이번에 심장 때문에 응급실에 2번 다녀와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왔다. 지금 내 심장에 달려있는 기계를 보라. 장수하고 싶은데 내 뜻대로 될지는 모르겠다. 연구해본 결과 록스타들은 대개 일찍 죽는다. 27살 아니면 급사. 믹 재거 같은 전설은 아직 살아있지만 그도 최근에 갑작스레 안 좋아진 건강 때문에 투어 스케줄을 통째로 날렸다. 매카트니 정도가 아직 정정하지. 나도 그처럼 몸 상태를 유지해 가능하면 노래도 계속 하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공연하고 싶다. 건강관리에 힘써서 하늘이 허락하는 한 오래 살아보겠다.

마지막으로 좌우명을 말해달라.

아까 말하지 않았나. 사는 것도 제기랄 죽는 것도 제기랄! 하하하.

“박물관 같은 집.” 퀸즈 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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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온갖 물건이 모여 있다. 오랜 깊은 삶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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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만들어준 스파게티. 고춧가루를 뿌려 먹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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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나온 안주. 1시간 인터뷰 뒤 3시간은 음악과 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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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7일, 퀸즈 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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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신〉에 받은 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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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즐거운 대화.” 2019년 8월 6일자 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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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ir · 2022.01.15

‘행복의 나라’ — 한대수가 쓴 이야기

2022년 초 ‘행복의 나라’가 외국 곡의 표절이라는 글이 인터넷에 돌았다. 한대수는 이를 반박하기 위해 1967년 작곡부터 1970년대 중반 다시 뉴욕으로 떠나기까지를 직접 써서 보냈다. 아래는 그 글 전문이다.

(한대수 선생님이 보내주신 글을 편집해 올립니다)

최근에 어느 블로그에 저의 '행복의 나라'가 표절이라며 어느 뉴질랜드 가수가 1971년 발표한 노래와 흡사하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행복의 나라'는 내가 1967년에 만든 곡이고 이에 대한 증거가 많습니다.

저는 보통 인터넷 글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악의적이고 질투 많은 사람들이 항상 꼬리를 물고 유명인들을 공격하며 그것을 통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74세이고, 이 지구를 걸어다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아내 옥산나와 딸 양호를 위해 앞으로 이런 악의의 거짓말에 대하여 사실로 무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가족을 함께 보호해주시길 바랍니다.

이하 '행복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행복의 나라' 작사작곡

제가 1967년 어느 주말 맨하탄에 위치한 우리 아버지 인쇄소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친 후, LIRR 롱아일랜드행 기차를 타고 집에 갈 때 2층 칸에서 본 광경은 광야는 넓게 펼쳐져 있고 푸른 하늘은 뭉게구름이 떠 있어 참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 괴롭고 슬펐습니다. 사업에 몰두하는 아버지는 너무 바빠 얼굴을 보기 힘들었고 백인 새엄마의 구박 때문에 살기 힘들었습니다.

그리하여 '행복의 나라'가 만들어졌습니다. "아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친다면" — 죽고 싶었기 때문에 제 자신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작곡했습니다. 그리고 첫 소절 "장막을 걷어라"는 남북분단을 안타깝고 슬프게 생각하여 이를 "iron curtain" 철의 장막에 비유해 말한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공산주의화를 경계하던 냉전시대였습니다.

또한 부산에 고등학교 절친들, 고릴라와 또복이가 그리워 "노는 아이들 소리"가 들리던 천진난만한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당시 롱아일랜드는 완전 백인동네였고 우리 고등학교도 100% 백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제게는 정체성 문제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한국말을 완전히 까먹은 상태였으니 저와 연결고리가 없었고 참 외로웠습니다. '행복의 나라'는 이런 시기에 만들어진 곡입니다.

2. 뉴욕에서 서울로

1969년 초 한국에 계신 어머니 권유로 귀국했습니다. 큰 사업가이신 우리 외삼촌이 제가 맨하탄 이스트빌리지 빈민굴에서 사는 것을 목격하고 우리 어머니에게 일렀기 때문입니다. "누나, 대수 이러다가 죽을 것 같아."

그래서 어머니가 "대수야, 너 바퀴벌레와 쥐가 기어다니는 빈민굴에서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마약하고 살면 곧 죽는다. 내가 너 대학도 보내고 예쁜 색시와 결혼도 시키고 집도 하나 마련해줄게, 빨리 온나! 그리고 너 쉬지 않고 기도하라"라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나는 GOYA 기타와 NIKKORMAT 카메라를 매고 노스웨스트 비행기에 올랐습니다(당시 대한항공이 없던 시절입니다).

3. '행복의 나라' 세시봉 무대

귀국하여 어머니의 명륜동 집 별채에 살면서 심심하여 서울에서 유일하게 라이브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세시봉으로 기타를 들고 갔습니다. 덩치가 큰 아저씨가 제 긴 머리와 찢어진 청바지를 흥미롭게 보고 "너 여기서 노래하고 싶어?"라고 하니 제가 "네"하자마자 짜장면 한 그릇이 배달되었습니다. 맛있게 먹고 나니 아저씨는 "그래, 이제 무대에 올라 노래해"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 흥분돼서 무대에 오르니 모든 것이 캄캄해졌습니다. 이후 당시 최고의 쇼프로 PD 이백천씨가 "여러분 오늘 세시봉에서 미국에서 귀국해 여러분 앞에 무대를 준비한 특별한 손님이 데뷔합니다"라고 하니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나는 하모니카를 목에 걸고 기타를 미친 듯이 치면서 먼저 '행복의 나라', 그리고 'Till that day', 이후 '옥의 슬픔'을 차례로 불렀습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마치 폭풍 같았습니다. 관객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긴 머리의 남자도 처음, 작사작곡을 직접 한 가수도 처음, 목에 건 하모니카를 불며 기타를 동시에 치는 가수도 처음, 그리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청년도 처음 본 것입니다.

그 당시 무대 옆에서 나를 열심히 본 두 사람은 '하얀 손수건'으로 데뷔한 트윈폴리오의 윤형주씨와 송창식씨였습니다. 꽉 찬 관객은 주로 대학생, 그 중 여학생이 70%가 넘었습니다. 당시 세시봉에서는 여성도 자유롭게 담배를 피울 수 있었으며 비록 인스턴트였지만 서울에서 커피를 처음으로 마실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이 내 음악을 듣고 흥분하는 모습을 본 서울대 영문학과 출신 이백천씨는 제가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You are great, come to my show tomorrow morning at TBC!"라며 유창한 영어로 환영해주었습니다.

4. '행복의 나라' TV방영

당시 한국 TV 채널은 KBS와 TBC(동양방송) 둘이었습니다. TBC의 프로그램 "명랑백화점"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MC는 유명한 김동건 아나운서, 악단장은 이봉조씨였습니다. 원래 게임프로였지만 그 날은 특별히 제게 라이브 노래를 부탁했습니다. 너무 떨리고 무서워 눈을 꼭 감고 정신나간 사람같이 고함지르듯이 노래를 부르고 하모니카를 불었습니다. 노래는 딱 한 곡, '행복의 나라'.

시청자는 아나운서, 악단장, PD 그리고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었습니다. 왜냐면 새마을운동으로 인해 마을마다 선사된 TV가 있었으며 밤마다 마을 사람들이 세탁소 앞에 백 명씩 모여앉아서 보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1969년 초에 '행복의 나라'는 세시봉과 TBC TV로 전국에 데뷔한 것입니다.

5. 기타선생님

TV 데뷔한 지 3일 만에 엄마 집에서 일을 도와주던 순이가 "대수오빠 전화왔어 빨리와"라고 했습니다. 전화를 받으니 "한대수씨 저는 당신의 팬입니다. 저와 절친이 TV를 같이 보고 무대에 너무 감동받았습니다. 음악도 정말 좋고 미국 히피의 자유를 느꼈습니다. 저희에게 당신의 노래와 기타를 가르쳐주시면 큰 영광이겠습니다. 레슨비는 원하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꼭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어디에 사십니까?"라고 해서 제가 명륜동이라 하니 그 분은 서울문리대에 다녀 걸어서 10분 거리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만나 보니 아주 매력적인 여대생 두 분이었는데 한 분은 금봉씨(가명) 이화여자 가정학과, 한 분은 바둑씨(가명) 서울문리대 불문과로 두 분 다 아주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고 특히 바둑씨는 명동에 아주 유명한 한식체인점 딸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기타선생을 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60년대 한국에서는 지금 김도균, 한상원, 함춘호 같은 기타리스트가 아직 태동하지 않은 시기였고 주로 '목포의 눈물' 정도 치는 기타리스트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만나 주로 코드를 한 개씩 배우고, 'Danny boy'나 나의 '행복의 나라' 같은 곡을 함께 쳤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내 방에 편히 앉아 서로의 고민과 꿈을 말하며 몰래 담배를 피우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 목격되면 어른들이 느닷없이 뺨을 때리는 게 용인되던 시절이기 때문입니다.

6. 드라마센터

금봉씨와 바둑씨는 나의 노래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특히, '행복의 나라', '바람과 나' 그리고 '마지막 꿈'을 좋아해 기타를 치면서 가사를 줄줄 외웠습니다. 어느날 두 분이 심각한 표정으로 "한대수씨 할말이 있어요"하면서, 내가 꼭 솔로 리사이틀(공연)을 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만 내 노래를 듣기에 너무 아깝고, 한국 음악계가 이미자씨와 남진씨만 장악하던 트로트음악으로는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 힘들며, 당신의 철학적 가사가 많은 젊은이들에게 힘이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돈은 어디서 구하냐 하니 둘이 재벌집의 석 달치 용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좋아! 둘의 희생과 열정에 대해 보답하겠습니다!"하고 공연을 결정했습니다.

이후 여름 내내 명륜동 골방에서 연습했습니다. 밴드는 없고 멤버는 나 하나뿐. 당시 기타나 드럼을 치는 사람도 별로 없었습니다. 공연은 1969년 9월 19-20일 이틀이었습니다. 밴드는 물론 사운드 엔지니어도 없었습니다.

어느날 명동을 지나가는데 스피커와 마이크가 길거리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아! 여기가 혹시? "사장님 제가 9월달에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하는데 마이크 2개, 그리고 앰프와 스피커를 빌릴 수 있습니까?" "가만있어봐라. 혹시 히피가수 한대수 아니요?" 네 한대수입니다. 히피가수가 아니고 그냥 가수입니다 하하. 그래서 마이크 4개(기타용 2개, 보컬용 2개)를 빌렸습니다. 잊지 못할 가게입니다.

생각보다 공연 사운드는 훌륭했습니다. 나는 당시 핑크플로이드의 음악에 빠져있어 무대에 등장하기 전 시계소리와 기차소리를 내고 향과 초를 피웠습니다. 또한 관객들의 집중을 받기 위해 스포트라이트를 내 등 뒤에 비췄고 큰 톱을 바이올린 활로 연주했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광경을 본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아주 허스키한 경상도 사투리와 영어 발음이 섞인 보이스의 제 보컬을 들으니 관객들은 쇼크가 왔습니다. 첫 번째곡 가사 "장막을 걷어라"로 시작하는 '행복의 나라'서부터 마지막곡 '잘가세'까지, 나는 500명의 관중을 내 손에 꼭 잡았습니다.

이후 프로그램도 나는 열심히 연주했습니다. 스위스에서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은 요들싱어 김홍철을 만나서 나의 리사이틀에 데뷔시켰습니다. 처음 듣는 이색적 소리였습니다. "대박!"

그리고 지금 고인이 된 유명한 조각가 전국광씨, 그는 나의 절친한 술친구였습니다. 조각능력뿐만 아니라 아주 전위적 시인이었습니다. 공연때 까만 터틀넥을 입히고 시 낭송을 시켰습니다. 마치 로드 맥퀸처럼 "내 몸에 간이 있다! 던져버려! 내 몸에 심장이 있다! 던져버려! 내 몸에 사랑이 있다! 던져버려! 내 몸에 질투가 있다! 던져버려!....."

그리고 트윈폴리오 윤형주, 송창식의 듀엣과 이백천씨 사회로 아주 멋진 엔터테이닝하고 아방가르드한 쇼가 만들어졌습니다. 나의 후원자 금봉씨와 바둑씨에게 깊은 감사를 느꼈습니다. 두 분이 후원한 드라마센터 공연이 없었다면 나는 이후 결코 음악의 길로 달려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7. 이별과 이혜전

곧이어 나는 당시 최고의 TV TBC PD인 이백천씨가 미국의 인기프로 "Laugh-in"을 본떠 만든 코미디와 라이브음악을 합친 재미있는 오락프로그램 "명랑백화점"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MC는 곽규석씨이고 출연자는 당시 최고의 인기스타 펄시스터즈, 트윈폴리오, 김상국, 코미디언 전우성 그리고 나였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라이브 녹화를 하는데, 어느날 매력적인 여자 탤런트가 나를 계단에서 마주치자 "한대수씨 음악이 너무 좋아요. 옆 골목에 맛있는 냉면집이 있는데 같이 갈래요?"라 했습니다. '와! 이런 미인이 내 음악을 좋아하다니?!' "네 물론이죠 지금 갑시다"하고 손을 잡았습니다.

이혜전, 아주 명랑하고 개방적이며 매력적인 여자였습니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그녀의 몸매도 유니크하게 아름다웠습니다. 한국 최초 아파트빌딩인 마포아파트에 살고 있었기에 자주 찾아가 맥주도 마시고 친해졌습니다.

2살 위인 혜전씨는 나의 사랑의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사랑에 도취되어 새벽길을 걷는데, 가로등은 아직도 켜져있고 바람은 내 긴 머리를 스쳐갔습니다. 그래서 "가로등 쳐다보며, 새벽은 밝고, 바람은 내 머리를 가볍게 휘날리며, 이것이 사랑인지?".. '사랑인지' 노래는 그렇게 즉흥적으로 작사작곡되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나의 좋은 두 후원자도 내가 TV탤런트와 사랑에 빠져있음을 눈치챘고 그들과는 뭔가 어색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혜전씨와 가까운 관계가 되다보니 자연스레 그 두 분과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All good things must come to an end".. 두 분께 내가 그 해에 국전 사진부분에서 입상한 작품을 한 개씩 선사하고 꼭 안아주며 영원히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두 분은 뭔가 섭섭한 쓴웃음을 지으며 나의 방문을 닫고 사라졌습니다.

"잘가세 내 친구. 내 사랑 뜻없는 미소 남기며, 시간따라, 가을따라 그리움없이. 바람은 사자와 같이 울고 외치는 이밤에. 내일 가고 오늘 오면 다시 찾으리" — 내 노래 '잘가세' 중..

8. 한국디자인포장센터

그러던 어느날 피곤해서 낮잠을 자려 누웠는데 가정부 순이가 "대수오빠 빨리와 전화야 상공부 장관실이래!" 전화를 받으니 "한대수씨 여기는 이낙선 상공부 장관실입니다. 지금 각하께서 우리나라 수출상품포장디자인을 발전시키기 위해 한국디자인포장센터를 창립합니다. 여기는 한국 최고의 디자이너, 조각가, 그래픽 아티스트, 그리고 사진가가 필요합니다. 한대수씨가 뉴욕에서 사진을 공부한 유일한 사람이기에 컬러 사진 기술도 뛰어나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당시 한국 코닥이 런칭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서울대 문리대 앞에 새로운 건물이 설계되었습니다. 급여는 5급공무원 수준입니다. 한국 수출산업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니 꼭 수락해주시길 바랍니다!"

실감이 안 나 어머니께 5급 공무원에 대해 물으니 20대 초반의 나에게는 큰 기회이니 무조건 수락해야 한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렇게 고민을 하던 중 다음 날 또 전화가 왔습니다. "한대수씨, 우리가 간부회의를 했는데 급여를 3급 공무원 수준으로 주기로 했습니다. 제발 고민 마시고 내일 아침 10시에 장관실로 오십시오."

당시 한국사진 수준은 피사체가 오징어나 명치를 말린 것이나 지게꾼 아저씨의 극적인 표정이 대부분이었고 물론 다 흑백사진이었습니다. "한대수씨, 참고로 넥타이는 매지 않아도 됩니다. 모든 디자이너는 편안한 옷차림으로 출근합니다."

내가 TV에서 노래할 때마다 슬피 울음을 터트리시던 어머니는 디자인센터에 출근하자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하셨기에 내가 기타치고 포크음악하는 모습을 저질로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매일 받던 2만원의 용돈이 3만원이 되었으며 어머니는 친구들에게 내 자랑을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디자인센터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개방적이었습니다. 독일에서 공부한 조각가, 영국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한 여류작가, 그리고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지폐디자이너이던 유명한 염인택씨. 그는 이후 아리랑 담뱃갑 디자이너로 명성을 얻게 되며 그래픽 디자인의 대가로서 나의 사진작업과 가깝게 팀워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정말 진실하고 쿨했기에 첫날부터 호형호제하며 이후 거의 매일 함께 소주잔을 기울였습니다.

3급 공무원 봉급은 양호했기에 처음으로 어머니 핸드백을 명동백화점에서 사드렸습니다. 이미 당시 20개 이상의 고급백을 가졌지만 그래도 "아이고, 우리 아들 최고다! 내가 꼭 주홍색 핸드백이 필요했는데, 정말 고맙다"하며 좋아하셨습니다. 제 삶이 뭔가 자리가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직원들과 대화하며 나는 한국식 제스처도 배웠습니다. 디자인센터에서 일하니 옷은 세미포멀하게 입을 수 있었고 나 말고도 머리 긴 디자이너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재밌게 지내다가 1년 정도 지난 때에 어느날 집에 돌아와 뭔가 심각하게 보이는 우편물이 있어 뜯으니 군대 영장이었습니다. 한창 일이 재미있어지려고 하는 시기였으며 또 아름다운 홍익대 미대생 이명신과 사귀고 나서 결혼이야기까지 의논하던 무렵 영장이라니? 그것도 1971년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당시 화폐(돈) 좀 있다 하는 집안 아들들은 많이 군 면제받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큰삼촌에게 달려가 좀 도와달라고 빌었는데, 삼촌은 "대수야 너는 군대가는 게 좋겠다. 그래야 너가 올바른 사람이 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좀 맞아야 인간이 될 것 같으니 고생 좀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나는 상공부 산하 공무원이었으니 병역을 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나는 약혼녀 명신과 해군 신병훈련소에 입대하기 일주일 전부터 내내 울었습니다. "혹시 가서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해군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북베트남은 해군력이 전혀 없고 육군 게릴라군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해군 세일러복(세라복)이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하하!

9. 해군 수병 한대수

진해신병훈련소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신병들은 모두 질서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빳다(야구배트)로 엉덩이에 호무란(홈런)을 맞았습니다. 나는 한 방 맞으니 온몸이 마비되기 시작하여 기절해버렸습니다. '어떻게 인간을 개보다 못하게 혹독하게 구타할 수 있나. 이건 유엔인권보호국에 신고해야 한다'할 정도로 아팠습니다.

육군보다 편하게 군복무하려고 했는데 육군은 신병훈련이 6주인데 비해 해군은 12주, 그것도 여름 6월부터 8월 가장 더울 때 구보하고 사격하고 갑판부 청소하고.. 겨드랑이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혹독했습니다. 우리 해군 149기는 90% 이상 무좀에 걸렸습니다.

신병훈련소를 수료하고 나는 곧 기함 DD-91 충무함으로 배치받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가끔 오는 기함이었기에 키가 큰 신병을 뽑았는데 당시 국민 대부분이 영양실조로 키가 작을 때였기에 내가 다섯 번째로 커서 뽑혔습니다.

그리고 나는 곧 구축함에서 가장 큰 사격포인 5인치포 장전수로 임명받았습니다. 장전하고 쏠 때마다 "아이구 소 한 마리 나가신다"라고 외쳤습니다. 포탄(SHELL)이 워낙 비쌌기에 하는 말이었습니다. 워낙 우리 해군이 가난해 2차대전에 쓴 미 해군 구축함을 수리해 쓰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훈련이 모자란 것이 큰 다행이었습니다. 포 보호망 터렛은 원래 귀마개를 쓰고 근무해야 하는데 우리 사격자와 장전수는 이마저 지급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담당 상사가 저에게 "한수병 포 쏠 때마다 입을 벌려라. 그래야 고막이 안 터진다"라고 했습니다.

보통 출동하면 짧게는 1달, 보통 2달, 길게는 3달을 바다에서 항해했습니다. 밤낮으로 땅을 못보고 바다만 봐야했습니다. 수병들 대부분은 배멀미 때문에 계속 토를 해서 다들 얼굴이 반쪽이었습니다.

어느날 또다시 3달 항해가 계획되어있어 김치, 돼지고기, 쌀 등 식량을 싣고 포를 점검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대수 수병 즉시 좌측 갑판부로 나와"라는 방송이 나왔습니다. 뭔가 하면서 뛰어갔는데 상사가 발령장을 주면서 "해군본부 참모총장실로 발령받았어. 90일동안 휴가나갔다가 총장실에 신고해라"라고 했습니다. '와 이게 무슨 행운이야? 90일휴가? 참모총장실?'

나는 약혼녀 명신과 꿈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경주 여행도 하고 명동 골목에서 나의 친구와 이사벨다방에서 한잔. 그리고 유명한 연극배우인 함형진과도 즐거운 오후를 보내고 또 저녁엔 바로 옆에 있는 YES록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며 취했습니다.

이렇게 90일을 보내고 복귀날 군화를 신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다리가 무거웠습니다. 가기가 싫었습니다. 약혼녀가 "대수, 2년만 참아 곧 끝날거야. 걱정마 난 꼭 기다릴게 우리 둘 다 힘내자고" 말하며 당시 노벨 문학상을 탄 솔제니친의 책 〈GULAG ARCHIPELAGO〉를 건네줬습니다. "맞다! 아무리 대한민국 해군이 혹독해도 러시아의 GULAG 포로수용소보다는 낫다. 그래 가자! WE CAN DO IT!"

10. 해군참모총장실의 한수병

참모총장실 복도로 신고하러 가는 길 보안이 엄격했습니다. 복도 양 측에 해병대 헌병 둘이서 모든 사람을 조사했습니다. 발령장을 보여주고 총장 비서실에 신고하니, 아주 잘생긴 중령이 나를 반겨주었습니다. "어 니가 한수병인가? 그래 웰컴!" 알고보니 남중령은 2년간 미국해군사관학교에 다녀온 엘리트로 당시 해군참모총장의 연설문을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그 글을 보니 너무 재미가 없고 감동적인 문구가 없었습니다.

해군본부에는 적어도 일주일에 두세번씩 외국 참모총장 등 VIP가 방문하니 영어 연설문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특히 태평양 사령관 STILWELL은 2주일에 1번 정도 느닷없이 방문해 우리를 당황시키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방문에는 꼭 2가지가 필요했는데, 영어연설문과 만찬회였습니다. 덕분에 나는 2년 동안 영어스피치를 300개 이상 작성했습니다.

1년 후에 9대 해군참모총장 장지수 제독이 예비역으로 은퇴하고 김규섭 제독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별 넷을 단 해군 제독 앞에 짝대기 셋을 단 해군 상병이 "참모총장님! 아닙니다. WE ARE HONERED는 위아'하'너드가 아니라 위아'아'너드라 발음하셔야합니다."하고 있으니 완전 코미디였지만 큰 영광이었습니다.

11. 양희은의 '행복의 나라'와 나의 앨범 〈멀고 먼 길〉

1972년에 라디오에서 어느 청순한 목소리의 여가수가 내 노래 '행복의 나라'를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너무 흥분되었습니다. 내 노래가 라디오에 흘러나오는건 최초의 경험이었습니다.

알고보니 내가 군입대하기 전 1971년에 CBS라디오 PD 김진성씨가 "한대수씨, 자네 군 복무기간에 죽을 수도 있으니, 당신의 주옥같은 곡을 우리 스튜디오에서 녹음합시다"라고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정확하게 맞는 말인게 내가 워낙 겁쟁이라 군대에서 빳다 한 대 맞고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김진성 PD는 최고 인기 팝송프로인 "YOUNG840" 담당자이자 팝송의 최고 전문가였고 긴머리에 나팔바지를 즐겨 입는 아주 잘생긴 호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CBS 스튜디오에서 2시간 동안 나의 모든 노래, '행복의 나라', '바람과 나', '옥의 슬픔', '잘가세', '마지막꿈', '고무신' 등 약 12곡을 녹음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군입대 때문에 앨범녹음 계약에 실패했습니다. 이렇게 김PD가 기록을 남겼고 이후 서강대를 다니던 포크싱어 양희은에게 '행복의 나라'를 부르라고 권했던 것입니다.

양희은 그녀의 목소리는 물같이 맑았습니다. 그리고 이미지도 청바지에 셔츠, 화장 안한 맨얼굴. 완전 우리 사회의 JOAN BAEZ였습니다. 양희은의 '행복의 나라'는 시간이 흐르며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히트송이 되었습니다. 사막이 오랜만에 내린 빗방울을 흡수하듯이, 나의 노래 '행복의 나라'는 양희은으로 인해 라디오로 전파된 것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12. 3년 3개월 만에 드디어 해군 제대

3년 3개월 만에 드디어 제대하고 해군본부 대문으로 나오는데 나의 약혼녀 명신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야 명신, 너무 고생했다. 이젠 끝났다. 결혼하자!" '솔제니친 선생님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권유로 우리는 연세대에 새로 건립한 루스채플홀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아름다운 교회, 햇빛이 천장 창문으로 쏟아지고 소프라노 가수가 주기도문을 부를 때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고통, 나의 시련, 나의 고독'이 한꺼번에 씻어내려갔습니다. 긴 Train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장인 김용식씨의 팔을 안고 입장하는데, 나는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그녀의 시련, 그녀의 고통, 그녀의 인내가 너무 고마웠습니다.

바로 다음날 김진성 PD가 나의 제대 소식을 듣고 나를 납치하듯이 택시에 태워 함께 신세계레코드 윤상호 사장을 만나러 갔습니다. 양희은이 내 노래를 젊은이들 사이에 히트곡으로 만든 상황에서 윤사장은 내 노래 전체로 앨범을 제작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야! 앨범이라니! OK! 합시다!"

바로 이틀 후 나는 당시 서울에 하나뿐이던 장충 스튜디오에서 하루만에 전체 앨범을 녹음했습니다. 나는 기타와 하모니카를 치고 임용환은 리드기타, 고 정성조씨가 플루트와 오르간 그리고 피아노, 나중에 가수가 된 조경수가 베이스, 신중현과 엽전들의 권용남이 드럼을 맡았습니다. 앨범은 모두 원테이크로 녹음된 라이브 그 자체였습니다.

13. 코리아 헤럴드

이후 코리아헤럴드 영자신문에 기자 7명을 뽑는다 공고가 났습니다. '아니, 결혼을 했으니 화폐를 벌어야지. 그래야 마누라가 행복하지.' 5000명이 이틀동안 시험치러왔습니다. 당시 한국은 완전 가난한 나라, 삼성은 합판회사였고 LG는 LUCKY치약과 GOLDSTAR라디오회사였고 SK는 선경TEIJIN 일본합작회사였습니다.

무직자가 수두룩한 시기에 감사하게도 내가 뽑혀 신문기자가 되었고 문화부 기자로 통행금지(12시) 이후에도 다닐 수 있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헤럴드 편집국에 들어서면 약 100개의 타자기 찍는 소리가 우렁찼습니다. 편집국장 샘킴의 말에 따라 3일동안 카메라 한 대 들고 경주박물관을 찍고 취재하기도 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김명희(현미의 조카)라는 인기있는 소울 가수가 나의 노래로 제1회 한국가요제에 참석하겠다고 허락을 받으러 왔습니다. 그리고 내게 직접 기타를 쳐달라고 했습니다. 와! 제1회 한국가요제라니? 대단하다 OK! 합시다! 곡은 '나혼자', 40인조 오케스트라에 더해 나와 임용환의 기타, 하모니카 그리고 마지막 절정에 톱연주. 우리는 작곡가상을 받았습니다. 군제대, 결혼, 취직, 베스트10 그리고 앨범 녹음이 이뤄진 것입니다.

이 때 나의 첫 앨범 〈멀고 먼 길〉은 젊은이들 사이에 폭발적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국민들이 처음 접한 새로운 사운드에 반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14. 앨범 〈고무신〉 발매와 다시 뉴욕망명

1집이 인기를 얻기 시작하자 명프로듀서이자 윤복희씨의 작곡가 엄진씨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한대수씨 이번에는 아주 명랑하고 유쾌한 앨범을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합시다." 'OK! 두 번째 앨범? 오 주여, 감사합니다.'

〈고무신〉 앨범은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했기에 녹음에 1주일이 걸렸습니다. 이 때 당시 무명 기타리스트이던 이정선과 퍼커셔니스트 류복성씨를 데뷔시켰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발매되자마자 문공부에서 앨범을 금지했고 수거명령이 내려졌습니다. 퇴폐음악이라고 했습니다. 국가는 나의 노래 '자유의 길'의 제목을 보고 "아니? 자유가 없단 말인가?" 그리고 앨범재킷을 보고 "왜 하필 죄수들이 신는 하얀 고무신이 철조망 위에 던져져있나? 이게 뭐야? 당신 빨갱이야?"라고 했습니다.

아이고 무서워라. 전화오는 것도 무서웠고 심지어 이후 프로듀서 엄진씨와도 전화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나의 1집 〈멀고 먼 길〉마저 수거명령이 났습니다. 한대수의 음악은 '방송금지, 공연금지, 발매금지' 그렇게 음악가로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래도 그 시절 매일 출퇴근하는 직장생활은 잘하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허무해졌습니다. 창의력과 에너지가 넘치던 20대 중반에 내가 사랑하는 음악을 못하니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마침 회사 문화부장 천성복씨(영문학의 대가)가 내게 자주 술을 권했습니다. 나는 부장님, 논설위원들과 같이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망각의 시대, 주정의 시대'로 나의 음악적 욕망을 태워버렸던 것입니다.

이 때 와이프 명신이 "대수씨, 당신 이러면 죽어. 빨리 뉴욕으로 돌아가! 거기서 다시 음악하면 되잖아. 직장 그만두고 이 나라를 떠나자" 그리하여 나는 사표를 내고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국장 샘킴이 "미스터 한, 나는 자네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있었어. 떠난다니 참 섭섭하네. 그래 행운을 빌게 GOOD LUCK MY FRIEND"라며 작별해주었습니다.

이상 '행복의 나라'를 작곡한 1967년부터 1969년 한국에 귀국했다가 후에 뉴욕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이야기였습니다.

한대수가 직접 정리한 타임라인

1967년 미국 LIRR 맨하탄에서 롱아일랜드 가는 기차에서 '행복의 나라' 작사작곡

1969년 세시봉에서 '행복의 나라' 발표. TBC-tv 명랑백화점에서 '행복의 나라' 발표. 9월 19-20일 드라마센터 솔로 리사이틀(참석자 : 이백천, 송창식, 이상벽, 윤형주, 조영남, 김동진, 이봉조, 김진성, 김홍철 그리고 3백만 이상의 TV 시청자분들)

1972년 양희은 '행복의 나라' 녹음 발표. 이후 서유석, 김정훈, 조영남, 홍민, 이선희 등 여럿이 많이 불렀음

1974년 한대수 〈멀고 먼 길〉 제대 후 첫 녹음

P.S. 내 노래 '행복의 나라'가 1973년에 발표된 어느 샹송의 표절이라는 말로 인터넷에 떴기에 이렇게 글을 써보았습니다. 인터넷에는 이러한 악의적 거짓과 루머가 항상 존재합니다. 내가 죽고나서라도 이러한 악의의 댓글과 거짓주장이 나오면 한국저작권협회가 잘 보호해주시기 바랍니다.

THANK You!

1/15/2022 한 대수

Discography

디스코그래피

정규 15장과 리메이크 1장. 따옴표 안은 전부 2019년 인터뷰에서 본인이 직접 한 말이다. 해설을 남의 평으로 채우지 않았다.

1집 〈멀고 먼 길〉(1974)
1집 〈멀고 먼 길〉(1974)
2집 〈고무신〉. 철조망 위에 걸린 흰 고무신이 금지 사유가 됐다
2집 〈고무신〉. 철조망 위에 걸린 흰 고무신이 금지 사유가 됐다
1집

〈멀고 먼 길〉

1974 · 신세계레코드

의외로 1974년작 1집이 가장 어려운 앨범이다. 45년이나 된 앨범이고. 그러나 1집은 편하게 들을 앨범은 결코 아니다. 오케스트레이션도 별로 없고. 들을수록 색다른, 어려운 음악이다.

2집

〈고무신〉

1975 · 신세계레코드

순수하고 오케스트레이션이 많은 2집 〈고무신〉으로 시작하라.

감상 순서를 묻자 첫 앨범으로 꼽았다. 발매 직후 문공부가 퇴폐음악으로 금지·수거했다.

3집

〈무한대〉

1989 · 신세계음향

뉴욕에서 겪게 된 이혼의 고통은 상상보다 훨씬 흉악했고 이를 승화한 앨범이다. 대중음악인들에게 ‘재즈’를 말하면 보통 떠올리는 장르는 ‘블루스’였다. 그래서 블루스를 자제한 재즈를 시도했고. 그것이 어떻게 보면 록이기도 하고.

4집

〈기억상실〉

1990 · 뮤직디자인

당대 뉴욕에서 유행하던 최첨단의 시각을 접목한 앨범이다. 팻 매스니, 칙 코리아, 찰스 로이드 같은 뮤지션들을 많이 들었다. 재즈 기타리스트 잭 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프리재즈에 가까웠나.

가장 아끼는 곡으로 ‘Headless man’을 꼽았다.

5집

〈천사들의 담화〉

1991 · 삼화레코드

들어봤으면 알겠지만 미니멀리즘 그 자체다. 왜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5집 찍겠다는 레코드사가 없었고 괴로운 마음에 그냥 뉴욕에서 출퇴근하며 돈을 벌었다. 그러다 불현듯 욕구가 샘솟고. 피아노 1대와 집에서 녹음했지.

인터뷰에서는 “1992년 5집”이라고 말했다.

6집

〈1975 고무신 서울 ~ 1997 후쿠오카 라이브〉 라이브

1999 · 도레미레코드

7집

〈Age of Reason Age of Treason〉 이성의 시대, 반역의 시대

1999 · 미국 발매

프로듀서 존 롤로와 뉴욕에서 작업했다. 당시 말랑말랑한 록이 유행이었는데 너무 카랑카랑하게 때려버려서 망했지만. 정통 록을 들으려면 이 앨범을 추천한다.

8집

〈Eternal Sorrow〉

2000 · Epi Music

번역하자면 영원한 슬픔 정도로 해두자. 기타리스트 손무현이 프로듀싱을 아주 깔끔하게 했다. 이때는 우리나라 최고 세션들이 모였다. 함춘호, 이우창, 신연아 등.

9집

〈고민: Source of Trouble〉

2002 · 풍류

본인이 권한 감상 순서에 들어 있다.

10집

〈상처〉

2004 · Hahndaesoo Corp

경희대 녹음실에서 깔끔하게 했고. 그때도 가장 유명한 세션들을 불렀고 지금은 뭐 이제 대가들이지 않나.

“나는 상처가 많다. 앨범 〈상처〉도 있지 않나.”

11집

〈2001 Live Olympic Fencing Stadium〉 라이브

2005 · 풍류

12집

〈욕망 Urge〉

2006 · 서울음반

내가 생각해도 괴짜다. 장영규가 프로듀싱 했고 달파란, 방준석 등과 같이 작업한 재밌는 앨범이다.

인터뷰에서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하다”며 함께 권한 ‘지렁이’가 이 앨범에 실려 있다.

13집

〈한대수 + 도올 광주라이브〉 라이브

2006 · 서울음반

14집

〈Crème de la Crème〉

2016 · 오디오가이

SACD(슈퍼오디오CD)로 제작된 국내 첫 대중음악 음반이다.

15집

〈하늘위로 구름따라〉

2020

본인이 마지막 앨범이라고 밝혔다. 2021년 한국 체류 중 이 앨범에 사인을 받았다.

리메이크

〈Rebirth〉 40주년 기념

2015

즐겁게 듣기에는 40주년 앨범 〈Rebirth〉가 좋다. 특히 10번 트랙 ‘Run baby run’을 들어보기 바란다. 김목경, 신대철, 김도균, 손무현 이렇게 블루스 기타 잘 치는 사람들이 다 모였다. 특히 이상은과 이현도 리메이크는 듣고 놀랐다.

조영남·전인권·이선희·신대철 등이 참여했다.

본인이 권한 감상 순서

  1. 고무신
  2. 무한대
  3. Eternal Sorrow
  4. 이성의 시대, 반역의 시대
  5. 고민
  6. 상처

1집 〈멀고 먼 길〉은 가장 익숙한 앨범이지만 본인은 “가장 어려운 앨범”으로 꼽아 마지막에 두라고 했다. 인터뷰에서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하다”며 함께 권한 ‘지렁이’는 앨범이 아니라 12집 〈욕망 Urge〉 수록곡이다.

Recommendations

한대수가 추천한 음악

인터뷰에서 직접 이름을 댄 아티스트와 앨범.

닐 영 〈After The Gold Rush〉

“한국의 닐 영이라 불러주었으면 한다. 닐 영과 나는 노래하는 스타일이나 삶에 대한 삐딱한 시선이 비슷하다고 본다.”

스크리밍 제이 호킨스 ‘I Put a Spell on You’

“할리우드 살 때 150명 들어갈 작은 클럽에서 보고 완전히 팬이 되었다. 한 수 위인 대단한 아티스트다.”

장 미셸 자르 전자음악

“전자음악 계통에서 장 미셸 자르를 좋아하고.”

브라이언 이노 솔로 앨범들

“브라이언 이노 솔로 앨범들도 추천한다.”

앨리스 쿠퍼

“쇼크록을 하고 집안이 목회 쪽이고.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뮤지션이지만 좋아한다.”

팻 매스니 · 칙 코리아 · 찰스 로이드

“〈기억상실〉을 만들 때 이런 뮤지션들을 많이 들었다.”

밥 딜런 〈The Freewheelin’〉 · ‘Positively 4th Street’

뉴욕의 음악적 장소를 묻자 먼저 꼽은 앨범 커버와 곡. 다만 “밥 딜런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레너드 코헨 ‘Chelsea Hotel’

“얼마 전에 작고한 레너드 코헨의 ‘Chelsea Hotel’이 바로 맨해튼에 있지.”

존 레논 ‘Nutopian International Anthem’

3초의 침묵으로 된 곡. 인터뷰 중 “‘침묵’도 음악이다”라는 대화로 이어졌다.

Quotes

어록

사는 것도 제기랄, 죽는 것도 제기랄!

좌우명을 묻자. 조선일보 칼럼 제목이기도 했다

한국의 밥 딜런이 아니라 한국의 닐 영이라 불러주었으면 한다.

수식어에 대해

원래 미국을 멜팅 팟이라고 불렀는데 현재 뉴욕은 이미 끓어 넘쳐 멜티드 오버 된 것 같다.

뉴욕의 단점을 묻자

가끔은 음악이 없었으면 좋겠다. 목소리가 듣기 좋은 사람과의 대화, 그 얼마나 좋은가.

음악 과잉의 시대에 대해

뉴욕은 딸을 세계인으로 키우려는 장소이고 나는 여기서 죽을 생각이 없다. 나는 서울이 좋다.

인생의 종착지를 묻자

아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친다면 — 죽고 싶었기 때문에 제 자신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작곡했습니다.

‘행복의 나라’ 가사에 대해, 2022년 회고록

Collection

사인과 저서

2021년 한국 체류 중 받은 사인 음반과 기타, 그리고 저서들.

사인 LP 〈멀고 먼 길〉과 〈고무신〉
사인 LP 〈멀고 먼 길〉과 〈고무신〉
사인 LP 〈무한대〉와 〈기억상실〉
사인 LP 〈무한대〉와 〈기억상실〉
사인 LP 〈욕망〉과 〈하늘 위로 구름 따라〉
사인 LP 〈욕망〉과 〈하늘 위로 구름 따라〉
“love”
“love”
“keep on rockin’!”
“keep on rockin’!”
시집 〈침묵〉
시집 〈침묵〉
〈사는 것도 제기랄 죽는 것도 제기랄〉
〈사는 것도 제기랄 죽는 것도 제기랄〉
〈뚜껑 열린 한대수〉
〈뚜껑 열린 한대수〉
〈인생은 인생〉
〈인생은 인생〉
2021년 11월,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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